2011. 1. 3. 15:33

1·4 후퇴는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연합군이 대규모로 퇴각한 사건으로 1951년 1월 4일은 서울을 공산진영에 빼앗긴 날이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1950년 10월 24일 한국군 제 6 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에서 중국군에 포위되었고, 이를 구출하기 위한 미국 제 1 기병사단마저도 26일에 포위되어 고전 하였다. 유엔군은 11월 24일 맥아더가 직접 지휘에 나서 총공격을 시도하며 방어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29일까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였고 12월 1일부터는 동부전선에서도 철수를 개시.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국 1해병사단, 한국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12월 4일에 평양을 철수하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흥남철수라고 한다.

흥남부두의 함상 철수장면을 노래한게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노래."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철수하면서 잃어버린 여동생 금순이 이야기.

12월 24일에 흥남에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이때 시민들은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다닐수 없었고 강물이 언 상태로 얼음위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8574


전열을 재정비한 국군과 연합군이 반격을 개시하며 한강을 중심으로 뺏고 뺏기고,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사진 http://blog.naver.com/smphillips?Redirect=Log&logNo=8002038211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272905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2729060


http://blog.naver.com/kimseogk?Redirect=Log&logNo=140088327599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지만 백성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6.25 전쟁은 수백만 명이 피란길로 내몰렸고, 피란을 가지 않은 사람들도 집이 불타고 먹을 게 없어 생사를 넘나들 수 밖에 없었다.


6.25 전쟁 때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몰려든 곳의 하나가 대전이다. 영호남으로 빠지는 교통의 요지라 북한과 서울· 경기도에서 난민이 쇄도했다. 51년 1월 6일자 대전일보에는 ‘피란민 각군(各郡) 할당 수용’이란 기사가 실렸다. 대전시내 수용소가 넘쳐 논산 2만, 공주 2만, 부여 1만명 등 충남도내 22개 수용소에 5만3000명을 분산 배치했다는 것이다. 난민이 날이 갈수록 늘어 15만명에 이르자 피란민에게 호남 방면으로 내려가라고 호소하게 된다.


피란민과 전재민(戰災民)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먹는 문제였다. 식량 거래가 끊겼고, 이렇다할 구호체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전역 주변에는 굶거나 얼어 죽는 피란민이 속출했다.


대전일보는 1950년 12월부터 피란민 돕기에 나선다. 31일자 ‘구하자! 불쌍한 우리 이재(罹災)동포’에서는 “피란 화차(貨車) 꼭대기에서 웅크린 할아버지와 어린아이, 수용소 가마니 위에서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누워있는 할머니도 모두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동포”라며 “한 술의 밥도 나눠 먹고 한 칸의 방도 나눠 쓰자”고 호소했다.

6·25 당시 대전과 부산 등 대도시 외곽에 속속 들어선 난민촌(위) 전경과 1951년 3월 구호양곡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난민들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백미를 실은 우마차의 국도 통과와 대전시내 진입을 허가한 충남계엄 민사부장 명의의 고시문. 대전일보 1951년 2월12일자.

글. 그림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909842




http://blog.naver.com/hwoasuk?Redirect=Log&logNo=140072218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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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