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9. 21:17

한양천도를 단행한 태종이 돈의문 밖에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를 짓고 모화루(慕華樓)라 명명했다. 중국 사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장대한 영은문도 세우고 연못도 팠다. 원나라 사신들이 묵던 송도 영빈관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 12년. 이곳에 묵은 중국 사신의 '우리가 상인도 아닌데 루(樓)가 뭐냐?'는 핀잔 한 마디에 모화관(慕華館)으로 문패를 갈아 달았다.

모화관에서 조칙(詔勅) 의식이 거행되었다.

"황제는 조선 국왕 이홍위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이제 너의 처 송씨를 왕비로 삼는다."

이래서 중국 사신을 칙사(勅使)라 한다. 칙서를 가져온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비록 조선에서 천대받던 천민출신이 출세하여 사신이 되어 돌아왔다 하더라도 북경에 있는 황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정과 성과 예를 갖추어야 한다.

가는 사신, 오는 사신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의주대로

조선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정월 초하루 황제에게 세배하러가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와 황후 생일축하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가는 천추사(天秋使). 동지에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포함해 년 4사(使)다. 훗날 중국이 번거롭다 하여 하정사와 동지사는 합병했다. 이밖에 사은사(謝恩使). 진하사(進賀使). 고명사(誥命使), 주청사(奏請使). 등등 구실도 많고 이름도 많다. 

조선이 사신을 보낼 때는 왕실의 대군이나 부마, 조정의 정승이나 판서급이 정사(正使)의 지위를 맡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중국은 그에 상응하는 지위에 있는 인물을 보내지 않았다.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황제국이고 너희는 제후국'이라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 약소국의 설움이다.

중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조선에서 공물로 바친 환관급에서 보냈다. 외교 현안이 있을 때는 조선이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 중에서 골라 보냈다. 조선 길들이기다. 조선 임금을 비롯한 실력자들에게 열패감과 굴욕감을 주어 황실을 우러러보게 하기 위함이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중국의 외교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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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log.daum.net/gijuzzang/4071655



http://blog.ohmynews.com/arts/266736?isPC=1





1884~ 5년 사이에 주한 미국공사관 무관이던 폴크가 찍은 영은문. 사진 설명에 서대문에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