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냥

‘자연스럽다’는 말뜻이 바뀌었다.

qlstnfp 2009. 9. 24. 20:30

다스리는 이와 다스림을 받는 이가 동일하다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지만

현실에서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투표가 끝나는 순간 대통령이며 국회의원들은 주인이 된다.


인민주권을 내세웠던 루소가 이미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영국인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투표용지가 함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노예다.”라고


투표가 끝난 순간 줄에 묶여 뱅뱅 돌아가는 누렁이가 되어 주인이 주는 밥 먹고, 배설하고, 새끼 낳고, 하루 종일 줄의 길이만큼 뱅뱅 돌다 주인님의 너그러움이 발동하면 줄에 묶여 나들이도 할 수 있다. 불만이 있다고 주인에게 덤벼 들었다가는 개장수 손에 줄이 넘겨진다.


민주주의라는 게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생각이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하늘이 무너져도 세워야 할 정의를 들먹이며 주인은 버르장머리 고쳐야 한다며 법을 만든다.


저 옛날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벌써 알아보았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도 법이란 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는 도구라 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임기제 주인이 저 들판의 곡식이나 사육장의 소·돼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기술 덕에 우리의 대부분은 다음 투표를 할 때까지 산다.


내 살 장소며 먹을거리, 자원을 마음데로 쓰지 말기를 바란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를 내세웠다. 주인님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기 보다는 ‘책임’이 먼저라는 것을 아셨으면 한다.

책임의 범위도 나와 가까운 ‘주변’과 ‘현재’만이 아니라 ‘저 멀리’ 그리고 ‘미래’까지 책임지라는 것이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할 때도, 악한 일을 할 때도 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내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는 정의는 따르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있게 참아주시는 너그러움을 요청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 년을 싸웠는데 어느 편이 선인지는 아마 신도 모르실 게다.


사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병이나 죽음은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급격히 발달한 의학과 기술 덕분에 병과 죽음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자연스럽다’는 말뜻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