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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28 이범진李範晉1852~1911
- 2011.01.27 The Call of Korea에 있는 사진
- 2011.01.18 나철 [羅喆]
- 2011.01.08 순정효황후(1894 ∼1966)
‘웃음은 마지막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처럼 인간의 참 삶은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엔 이성에 바탕한 상쇄율(相殺律)이 있어 공이 과를 상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친러파....
이범진(李範晉:1852~1911)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자는 성삼(聖三)이다. 그의 부친은 이경하(李景夏)이며 조선왕조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 로스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이경하의 서자로 서울 낙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후원으로 궁중에 출입하였고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고 1884년 홍문관 수찬,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에 협판내무부사.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내정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고종과 민비는 이범진, 이완용을 입각시켜 친러내각을 구성했다.
농상공부대신서리가 되어 친로정책을 추진.
1895년(고종 32) 일제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러시아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
일제와 친일파가 주도하는 제4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895년 10월에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는 춘생문(春生問)사건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러시아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이 친미파에게 밀지를 내려 왕궁 밖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건
. 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으로 민심이 소란한 틈을 타서 다시 국내에 잠입한 이범진은 러시아를 설득하여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1896년 2월 7일 인천(仁川) 제물포항에 러시아 군함이 입항했으며 1백 여명의 군사가 러시아공관 수비를 명분으로 서울에 입성.
이범진은 엄상궁과 긴밀하게 협조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는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후 김홍집, 정병하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내각의 법무대신 겸 경무사가 돤다.
그해 7월 군인을 경복궁에 투입,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 등을 죽이고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범진은 을미사변 재수사를 주장하여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밀렸는지 1896년 7월 제물포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미국 워싱턴으로 떠나 주미공사로 3년간, 1899년 3월 프랑스공사(公使)에 임명되어 1900년 부임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대한제국의 공식행사를 주관하였고 1900년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자 일본 견제를 위한 러시아 외교 강화 차원에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다시 러시아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고종과 짜르의 밀서를 전달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는 만주지역의 이권사업에만 관심을 두었다.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는 한국의 친로수구파정부에게 용암포 항의 조차를 요구하였고 한국정부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용암포 조차를 승인하는 공문을 이범진에게 보냈으나 이범진은 용암포의 러시아에의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고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정부에서는 그를 파직하고 참서관 김인석을 대리공사로 임명하여 이 공문을 전달한 다음에 후에 이르러서야 공사로 복직시켰다.
용암포사건 (龍巖浦事件)-1903년(광무 7) 러시아가 한국의 용암포를 강제점령하고 조차(租借)를 요구한 사건
1904년 2월 러일전쟁(露日戰爭)의 패전으로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몰락하자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그의 처지.....
일본 외무성은 주재국 정부를 통해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한국이 청·일본·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 등 9개국에 개설한 한국 공관 폐쇄를 요구했다..
한국 외교관들이 본국의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12월 외부대신 이완용 명의로 폐쇄 훈령을 내렸다. 주일공사 조민희, 주독공사 민철훈, 주미대리공사 김윤정, 주청(駐淸)대리공사 박태영은 훈령에 따라 공관 기록과 재산을 주재국 일본공사에게 넘기고 귀국했다. 주불(駐佛)공사 민영찬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한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1852~1911)은 일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양국황제의 밀사의 명목으로 계속 러시아 수도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도 선생은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아파트에 옮겨 살면서 1910년까지 여권발급 등 공사업무를 계속하였다.
1907년 고종은 이범진을 통해 국제사회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1907년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밀사 이상설, 이준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버지가 공사로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관에서 1등 서기관으로 일하던 아들 이위종을 밀사로 임원 겸 통역으로 동반케 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특사들을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면서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케 하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 밀사 파견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1908년에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내었으며, 1909년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계동학교, 세동학교, 신동학교를 통합하여 큰 규모의 한민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1천 루불을 보내어 교포들의 교육 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
해외 항일 언론의 모태이기도 한 ‘해조신문(海潮新聞)’이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범진은 곧바로 축하편지와 함께 지원금을 보낸다. 3년 전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의 논설로 세상을 일갈했던 장지연 선생이 주필을 맡은 ‘해조신문’은 재러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한글신문으로서 비록 3개월 동안(1908·2·26~5·26) 총 75호를 낸, 단명의 신문이었지만,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는 데 크게 이바지한 애국의 목탁이었다. 이범진은 같은 해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결성된 대표적 의병투쟁 조직체인 ‘동의회(同義會)’에도 금 1만루블을 휴대한 아들 이위종과 그의 장인인 사돈 놀켄 남작을 보내 지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신한촌의 민족교육기관인 한민학교 설립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더욱 악랄하게 기승을 부리자 이범진은 국내 진공까지 시도한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서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럴 때 자신이 총사령관, 이범윤이 부총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거듭 천명한다. 그 후 안중근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협심해 의병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그는 1905년 6월부터 1911년 1월 자결할 때까지 홀로 비서와 함께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전 재산을 정리해 서슴없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는 자산으로 7만루블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주 국민회에 5000루블, 미주 무관학교에 3000루블, 미주 신문사에 1500루블, 하외이에 1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사에 1000루블을 각각 기증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비로 5000루블, 아들 이위종 부부에게 약간의 금액을 유언으로 남긴다. 장례비만 남겨놓고 독립운동에 사재를 다 털어놓은 처지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11년 1월14일과 22일자 지면에 한 동양인의 자결과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월13일 낮 12시 한국 공사인 ‘왕자 이범진’(59세)은 체르노레친스카야 거리 5번지에 있는 방이 6개가 달린 한 목조건물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설치하고 목 매달아 사망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총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고인이 관할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고 지극히 평정한 마음 상태에서 자결한 것이며, 이는 조국이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명분이 없고
이범진은 고종황제에게 “우리의 조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결 원인을 담담히 적고 있다.
1월21일 ‘애국왕자’의 시신이 안치된 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친지들과 함께 각지에서 온 한국 교민대표단과 조문객 등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고인을 바랬다. 태극기가 덮인 관과 조문객을 태운 세 대의 운구열차가 핀란드역을 떠나 장지인 우즈펜스키 묘지에 이르러 그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비명에 간 고인의 유언이런가, 영안실이나 장지에서는 아무런 장례의식이나 추도사도 행해지지 않았다.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이위종 (李瑋鍾 , 1887~?)
주 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李範晉)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1896년 부친이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워싱턴으로 갔으며 1899년 부친이 다시 주 프랑스 공사관으로 임명되자 공사관 서기생으로 일했다. 190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냈으며 러시아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외교적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위종은 이들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다.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만국기자협회를 통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현지에서 울분으로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일본을 의식한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부친 이범진의 자결로 받은 충격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러시아 시민이되어 혁명에 가담하였고 혁명군과 연대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러시아 귀족인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해 낳은 3명의 딸 가운데 둘째 딸의 후손인 피스쿨로바는.
"1919년 8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1절 기념 집회에서 이위종인 것이 거의 확실한 한국인 적군(赤軍) 장교가 연사로 나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한 뒤 시베리아와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 내보내 줄 것을 소련 정부에 요청하자고 호소했다는 신문기사 뿐이다. 이후의 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는 구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그가 1910년대 중반 블라디미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볼셰비키 혁명 후 적군에 입대해 극동 지역에서 혁명 간섭군인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 공산당 적군(赤軍)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무찌르고 조국을 해방시키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초상화 출처 http://www.consumertimes.net/news/article.html?no=6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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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ll of Korea
Horace Grant Underwood
Fleming H. Revell Company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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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text
http://www.archive.org/stream/callofkoreapolit00unde/callofkoreapolit00unde_djvu.txt
원본자료 http://j.mp/eLY9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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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羅喆, 1863~1916]
1863년(철종 14)∼1916년. 대종교의 초대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나주(羅州).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1. 구국운동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발노인으로부터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 三一神誥》와 《신사기 神事紀》라고 한다.
1906년, 일본의 반성을 다시 한번 촉구하기 위해 도일하여 당시 이토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하였으나 별효과를 얻지 못하고,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탄로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그해에 풀려났다.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2. 단군교 공포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 단군교의 포교를 사명으로 하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한다. 어쨌든, 귀국하자마자 오기호·강우(姜友)·유근(柳瑾)·정훈모(鄭薰模)·이기·김인식·박호암(朴湖巖)·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불리는 날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오대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가산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 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3. 단군교의 시련과 가경절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8월 14일,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과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16일 새벽에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이후에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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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는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정효황후(1894 ∼1966)다. 윤택영(尹澤榮 1866 ∼1935)의 딸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순종의 황태자 시절인 1904년에 황태자비 민씨(훗날 순명효황후로 추존) 가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폐위하면서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14살의 나이에 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윤택영이 당시 황후이던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는 소문과 그때 진 빚에 얽힌 일화들...
엘리자베스 키스의 화집인 <옛한국(Old Korea, 1946년 영국 발행)>의 그림 중에 '궁중 예복을 입은 공주(Princess in court dress)'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해평 윤씨 순정효황후(1894 ∼1966)의 여동생 연희전문 부교장을 역임한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의 부인인 윤희섭이다.
조선시대 예복(禮服)인 당의(唐衣)를 입고 화려한 족두리를 쓰고 있는 모습이 예사로운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키스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머리에 까만 띠를 하고, 그 위에 금으로 만든 새를 붙이고 있었다. (She wore on her head a black band with a tiny gold bird in the front, the Korean insignia of royalty.) 그녀가 몰락한 조선왕조 왕족의 공주라는 표시였다. (This was a Princess of the deposed Korean Royal House.)"
--<옛한국> 65쪽
키스는 이 여인이 "크리스천 계열 대학의 교수와 결혼한 유부녀였다(She was married to a Korean professor of a Christian college. <옛한국> 65쪽)"
당시 서울에서 크리스천 계열의 대학은 연희전문뿐이었고, 연희전문 부교장을 역임한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
근대 유명 인물들의 신상을 기록한 <인사흥신>(1935년 발행)에서 유억겸을 찾아보면, 근대의 선구자 유길준의 아들이다. 1937년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윤치호(尹致昊)·장덕수(張德洙) 등과 함께 검거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뤘다. 광복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회장, 미군정청 학무국장, 1946년 초대 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문교부장 당시 국립대학설립안(국대안)을 실현시켰지만,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개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가회동(嘉會洞 9-2호)에 거주하고 있고 부인은 윤희섭(尹喜燮 1905년 11월 생)이다.
그리고 윤희섭이 왕실과 어떤 관계인지는 1936년 9월 21일자 매일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매일신보 1936년 9월 21일자에 실린 ''대비전하 생모 사망' 부고 기사를 보면, 유억겸 연희전문 부교장의 부인은 '창덕궁 대비전하'(순정효황후, 당시 호칭 윤비)의 여동생임이라고 했다. 따라서 연희전문 부교장 유억겸은 해풍부원군 윤택영 후작의 사위로 순종과 동서간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여인은 '공주'가 아니라,
"당당하고 기품이 있었다.'면서, 그녀가 거처하는 방에는 사치품이 없고 깔끔했다고 했다.
그러면 이 그림은 언제 그린 것일까?
삼천리 잡지 1940년 3월호에 실린 '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유억겸' 기사를 보면 그가 윤희섭과 1922년에 결혼했음을 알 수 있다.
一, 先生 氏名 유억겸(兪億兼) 연령 44 고향 경성(京城) 학력 도쿄 제국대학(東京 帝國大學) 법학부 졸업
영부인(令夫人) 氏名 윤희섭(尹喜燮) 연령 35 고향 경성(京城) 학력 가정교육 뿐
★ 두 분께서는 연애결혼 하섯슴니까, 媒約 결혼 하섯슴니까.
「媒約 결혼」
★ 결혼식은 몃해 전, 어느 지방서, 그때 주례는, 축사한 인사는, 주요한 내빈은?
「距今 심팔년 전, 京城, 故 이강원(李康原) 목사 주례」
★ 신혼여행은 어느 지방으로 몃츨 동안이나 가섯슴니까.
「간 일 없읍니다」
二, 貴 가정의 가훈
「信 言行心思 善」
--<삼천리> 제12권 제3호(1940.3.1)
키스는 이 여인이 유부녀라고 했으니, 1922년 이후에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키스는 <옛한국>에서 이 여인이 흰 상복을 입고 있다고 했다.
결혼을 한 1922년 이후 이 여인이 당한 상은 1926년 순종 국상, 1935년 친정아버지 윤택영 상, 1936년의 친정어머니 상이니, 1926년에서 친정어머니 상을 당한지 일년이 되는 1937년 즉 21살 ~ 32살 사이에 그린 그림이다.
친정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그의 형 윤덕영(尹德榮:1873∼1940)은 우리나라 근대 황실 인척 중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후의 아버지 윤택영은 조선 최고의 '채무왕'이었고, 숙부 윤덕영은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였다.
윤택영이 큰 빚을 졌음은 1907년 6월 1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물론 기사에서는 결혼비용으로 진 빚이 2백만 냥이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황태자비 간택 뇌물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황성신문에 공개된 윤택영의 빚은 2백만 냥으로, 대한제국 금융 자료에 의하면 당시에는 10냥이 1원이었다. (쌀 한가마니에 4원) 따라서 2백만 냥이면 20만원인데, 당시 서울 시내에 있는 웬만한 기와집 값이 만원이었으니 20채 값이다. 요즘 서울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억 원 정도다.
기사에 의하면 빚쟁이들이 매일 윤택영의 집 앞에서 빚 독촉을 했고, 순종은 황실의 체면과 품위유지를 위해 빚의 절반인 10만원을 특별하사금으로 하사했다. 그러나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어린 장인을 둔 순종과 '채무왕' 아버지를 둔 황후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성신문은 1910년 1월 15일자 보도에 의하면, 1907년에 20만원이던 윤택영의 빚은 순종이 반을 갚아줬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50~60만원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월 22일에는, 황후가 열흘마다 5백 원씩 보태준다는 설이 있음을 보도했다. 어질고 순하다는 평판의 황후의 마음고생을 시킨 건 친정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윤택영은 강제합병 후 황후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후작 작위를 수여받고 은사금으로 무려 50만원을 하사 받았었다. 당시 50~ 60만이던 빚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나 그 돈으로도 빚을 갚기에 부족했는지, 1911년에는 빚 받으러 온 빚쟁이에게 재산이 3백 원뿐이라고 주장했고 빚쟁이는 소송을 했다. 결국 1911년 4월 11일, 집안에 있던 물건에 대해 경매가 붙여져 부인의 옷, 고종이 하사한 꽃병까지 경매되는 수모를 당했다.(‘매일신보’ 1911년 4월13일자 ‘윤후작의 재산경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윤택영의 빚은 계속 늘어났고, 빚쟁이의 단련을 견디다 못한 그는 큰아들 윤홍섭을 데리고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20년 7월8일이었다. 그렇다면 1922년에 있었던 그림의 주인공인 둘째딸 결혼식은 어떻게 중매를 했고 어떻게 치뤘을까?
매일신보 1922년 11월 17일자에 보면, 황후의 여동생이자 윤택영의 둘째딸 '차순'(본명이 희섭이기 때문에 아명으로 추정)이 나이가 18세가 되어 "삼촌되시는 윤덕영 자작의 주장으로" 유길준 선생의 둘째 아들 유억겸씨와 약혼하고, 오는 20일 오전에 간동 97번지 윤택영 본댁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약혼 후 5일만에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중으로 도망간 윤택영이 서울에 오래 머물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듯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때, 당대의 명문가인 유길준 집안에서 '채무왕' 집과 혼사를 맺는다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답은 <삼천리> 잡지 1939년 6월호에 있다.
人物評(一), 忠北知事 兪萬兼論 (인물평, 충북지사 유만겸)
氏의 父君(부군)이 바로 韓末 開化(한말 개화)의 先鋒(선봉)인 兪吉濬(유길준)씨다. 외국 유학을 처음 간 이요 改革內閣(개혁내각)의 內部大臣(내부대신)까지 지냈으며 그 第一子婦(萬兼씨의 夫人)(첫번째 며느리, 만겸씨의 부인)를 선택할 때에 優生學的(우생학적) 견지에서 또는 婚閥(혼벌)을 타파하는 의미에서 北婚(북혼)을 일부러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에 보기 어려운 개화가정이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삼천리 통권 11권7호(1939.6.1)
혼벌은 세도가, 명문가, 재력가에서의 정략결혼인데, 유길준 가문에서는 큰 아들 유만겸이 결혼할 때도 혼벌을 타파한 개화가정이기에 '채무왕' 딸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택영은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둘째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까? 그 답은 순종실록에 있다.
딸의 혼인을 치루는 후작 윤택영에게 돈을 하사하다.
--<순종실록부록> 1922.11.15일
윤택영은 11월 15일에 서울에 있었고, 빚쟁들에게는 하사금 받아 주겠다고 둘러대며 결혼식을 치뤘을 것이다. 그리고 윤택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다시 중국으로 도망갔다.
중국에서 지내던 윤택영이 다시 귀국한 것은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윤택영은 기차를 타고 왔는데, 빚쟁이들 때문에 서울역에서 내릴 수가 없어 문산역에서 내린 후 황실에서 보내준 승용차를 타고 빚쟁이들이 몰려 올려 올수 없는 창덕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문산으로가서 중국행 열차를 타고 다시 베이징으로 도주했다.
윤택영이 다시 중국으로 달아나자 빚쟁이들은 법원에 윤택영에 대한 파산신청을 했는데, 신청된 1926년 당시 채무 총액이 350만원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당시 언론들은 재판때마다 중계방송하듯 공판결과를 보도했다.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 윤택영은 순종 장례 이후 다시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1935년 10월 23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후 나이 어느덧 42살이었다. 13살 때부터 시작된 마음고생은 그렇게 끝났고, 허망한 슬픔만 남았다.
창덕궁을 떠나 낙선재로 간 순정효황후는 몰락한 왕실 친인척의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남은 생을 보냈다. 덕혜옹주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돌아오는 모습도 지켜본 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9월 28일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숙부인 윤덕영이 황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이완용에게 바쳤다.
윤덕영은 이 일로 강제합병 후 자작의 작위를 수여 받았고, 은사금 5만원을 받았다. 194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일기관인 중추원 부의장, 고문 등의 요직을 역임했고, 총독부의 전시정책 자문기관인 시국대책조사위원회의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과 고문을 지냈다. 그는 아우와는 달리 재물을 모았고, 1920년 설립된 해동은행의 초대 은행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고종황제 국장 때 ‘분참봉첩지’를 위조해 판 혐으로 수사를 받게 되면서 곧바로 하차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분참봉첩지 위조사건’은 윤덕영이 주동이 되어 몇몇 다른 귀족들과 함께 고종황제의 장례식 때의 임시직인 ‘분참봉’에 임명한다는 첩지를 위조하여 판매한 사건이다. '분참봉' 첩지가 있으면 양반출신 행세를 할 수 있던 시절이라 수요가 있었고, 윤덕영은 이를 이용해 위조 첩지를 팔았던 것이다. 황후의 숙부이기에 벌일 수 있던 웃지못할 사기극이었다.
http://blog.ohmynews.com/arts/273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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